'지정기부금단체'에 해당되는 글 658건

  1. 2024.04.05 얼음땡
  2. 2024.04.04 변태
  3. 2024.04.01 난임 1
  4. 2024.03.28 나라사랑
  5. 2024.03.27 단체설립, 기본재산
  6. 2024.03.25 뒷자리
  7. 2024.03.22 위기의식
  8. 2024.03.21 이사 갑니다 1
  9. 2024.03.20 왜곡 곡해
  10. 2024.03.19 파송송 계란탁

얼음땡

카테고리 없음 2024. 4. 5. 15:06

유권자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권리행사를 하고 왔습니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한 표가 이 세상을 바꾸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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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10번씩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 있습니다.
“식사 부족하면 말씀하세요.
반찬 더 달라고 하세요.
맛있게 드시고 건강하세요.”
끊임없이, 계속, 말하고 또 말합니다.
나뿐 아니라 모든 봉사자가 돌아가며 묻고 또 묻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이용자는 똑같은 말을 30번 이상 듣는 셈입니다.
일반식당에서 이러면 “굉장히 친절한 식당이네”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료급식을 대접하는 게 봉사자에겐 당연한 의무이고,
이용자에겐 당연한 권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나무료급식소에서는 그냥 자연스런 일상입니다.  
서로 부담주는 일도, 받는 일도 없습니다.

퇴근하면 아이들과 놀아줍니다.
거실에서 간지럼을 피며 뒹굽니다.
그러면 온 동네가 떠나가라 웃어댑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립니다.
모르는 전화번호 혹은 후원자의 전화번호가 뜹니다.
그러면 일순간 집안이 조용해집니다. 정적이 흐릅니다.
아빠가 통화를 마칠 때까지 쥐 죽은 듯이 있습니다.
마치 전통놀이 “술래잡기, 얼음땡”처럼 몸이 굳어버립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지 않았습니다.
많은 훈련과 경험(폭력)을 통해 터득한 것입니다.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전화벨이 울리면
주방에서 대파를 썰던 엄마가 아이들이 있는 거실쪽으로 몸을 던집니다.
야구선수 전준호 선수처럼 아슬아슬하게 슬라이딩 세이프를 시도합니다.
아이들 등짝에 스매싱을 후려갈깁니다.
볼기짝에 나이스캐치를 합니다.
드디어 도루에 성공한 것입니다.
SBS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봤던 조인성의 주먹울음과 같은 상황이 펼쳐집니다.
아이들은 웃음과 고통이 공존하는 감정 속에서 입을 틀어막느라 고생합니다.
아직 6세와 8세가 감당하기엔 벅찬 줄 알지만 뭐 어떡하겠어요?
아빠가 후원자에게만 집중할 수 있도록 온 가족이 내재화된 상태입니다.
아이들 머릿속에 칩셋이 심겨졌습니다.
“후원자, 이용자, 봉사자, 교회성도, 이웃 어른”
이런 사람들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규격화를 마친 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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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

카테고리 없음 2024. 4. 4. 14:57

여행 유튜버 빠니보틀이 있습니다.
코로나로 국경이 폐쇄되고 야외활동이 제한됐을 때
이 사람 덕분에 여행에 대한 대리만족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구독자가 60만명일 때 구독했지만 지금은 더 유명해져서 213만명이나 됩니다.
요즘은 TV를 틀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지만 초창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보다 덜 유명했고 소수의 팬들과 상호작용했습니다. 따라서 말과 행동에 거침이 없었습니다.
생소한 곳, 위험한 곳, 색다른 경험을 통해 구독자로 하여금 희열을 느끼게 했습니다.
낯선 곳에서 비박(biwak)하는 모습도,
사기꾼과의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 담력도 있었습니다. 그의 대범함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1년 전쯤, 남미를 여행했습니다. 그리고 최종 목적지인 남극을 거쳐 돌아오는 계획을 짰습니다.
한참을 여행하다 남극 땅을 밟기 직전에 심경의 변화가 왔습니다.
실시간방송을 통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전에는 비행기를 타도 설렘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다.
구독자가 점점 늘어나고,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슈화가 되니,
여행이 여행이 아닌 중압감이 됐고 고통으로 변해버렸다.
여기서 여행을 중단하고 재충전을 가져야겠다.”
실제로 이후로 많이 변했습니다. 더 의젓해졌고 조심스러워졌습니다.
말 한 마디를 해도 생각 많이 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내 이야기를 소재로 사용합니다.
내가 겪었던 이야기들, 현재 느끼고 있는 상념들을 써내려갑니다.
그런데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지켜보던 고향 사람들은 더 그렇게 느낄 겁니다.
김성민의 상반된 모습,
그땐 망나니 같았고, 구제불능이었습니다.
거침없었고 굉장히 교만했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나인 줄 착각했습니다.
못 봐줄 만큼 인간말종이었습니다.
덜 되먹은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히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과거의 모습과 전혀 다른 인격, 다른 사람이 돼 있습니다.
특히 글을 접할 따마다 이렇게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내가 알던 김성민 맞아?”
비도덕적이고 비인격적이었던 사람이 마치 인품 있는 것처럼 글쓰고 행동하고 무료급식을 하니 그럴 만도 할 테죠.
“그러면 지금은 나아졌냐?” 물으면 똑같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불쑥불쑥 나오는 옛 성격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못된 성격이 아직도 존재합니다.
나는 별 수 없는 인간인가 봅니다.
못된 성격을 바꾸기 위해 묘책을 고안했습니다.
글쓰기를 통해 성격을 바꿔가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바꿔버렸습니다.
글쓰기가 내 행동을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쓰면 정말 은혜 잊지 않으려 노력하게 되고,
“겸손하겠습니다.”라고 쓰면 조금은 겸손해지는 것 같습니다.
언행일치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습니다.
옛날 내 모습을 봐왔던 사람들에게 부탁합니다.
김성민, 더욱 갱신하고 더욱 변태하겠습니다.
앞으로 지켜봐주십시오.
더 의젓하고 더 겸손한 김성민으로 탈바꿈해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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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임

카테고리 없음 2024. 4. 1. 20:47

오늘 교회종탑을 철거했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부흥의 기쁨도, 쓰린 추억도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입니다.
그래도 좋은 기억이 더 많은 곳입니다.
여기와서 복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 이사 갈 채비를 하나씩 하나씩 하고 있습니다.
주위에서 많이 묻습니다.
“목사님, 이사가면 주소 꼭 알려주셔야 해요. 정기적으로 생리대 보내고 있는데 주소변경 해놓게요.
목사님, 우리 카페에 공지해야하거든요. 꼭 알려주세요.“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주소가 확정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
결혼하면 저절로 아이가 생기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쉽지 않았습니다.
산부인과에서 숙젯날도 받아오고, 약도 먹고, 인공수정, 시험관시술 등 온갖 방법을 써봤지만 임신은 되지 않았습니다.
좋다는 한의원과 한약, 난임전문병원 등 전부 돌아다녀봤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번 달은 되겠지, 이번에는 꼭 될거야. 예감이 좋아."
매번 희망과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지나가는 어미 개와 강아지만 봐도 눈물이 났습니다.
“동물들도 새끼가 있는데 우리는 왜 이리 힘든 걸까?”
난임병원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면
임신에 성공했다며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의사선생님께 연신 고개를 숙이는 사람을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눈가에 눈물이 가득 맺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7년을 넘게 임신시도를 하니 심신이 지쳐갔습니다.
자궁에도 자극을 됐나봅니다.
검사를 하던 중 갑자기 큰 병원에 가보라는 얘길 들었습니다.
수원 성빈센트병원을 갔습니다.
난소에 암이 발견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릴 들었습니다.
너무 큰 층격이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우리 부부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병원을 나와 정처없이 운전하다 장안공원을 가게 됐습니다.
벤치에 앉아 서로 아무 말없이 다른 시선을 멍하게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어느 순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펑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이 서러웠고, 곧 죽는 걸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간절했던 아이는 안 생기고 암이라니 모든 게 야속하기만 했습니다.
그날따라 날씨는 굉장히 쾌청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 마음은 우울한데 날씨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웠습니다.
더욱 낙심 됐고 모든 소망이 끊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병원을 국립암센터로 옮겼고, 좋은 의사선생님을 만나 임신과 암치료를 동시에 시도할 수 있게 됐습니다.
첫번째 진료를 마치고 처방전을 들고 병원을 나섰습니다.
여러 약국 중에 “희망약국”이란 곳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둘은 서로 마주보며 “여기로 갑시다”란 묵언의 대화를 하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소년소녀처럼 달려갔습니다.
지금은 완치판정을 받았으며, 자녀도 둘이나 생기는 기적을 맛보게 됐습니다.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하지만 그래도 날마다 새로운 삶을 허락한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가 소중합니다.
우리에겐 날마다 날마다 새 날의 연속입니다.
덤으로 살아가는 삶이고,
기적을 직접 체험하며 살아가는 현재진행형인 삶입니다.
따라서 우리 부부는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삶으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다짐했습니다.
항상 주위를 돌아보며 더 겸손하게 살것을 약속합니다.

Posted by 만나무료급식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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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사랑

카테고리 없음 2024. 3. 28. 12:39

점심 무료급식 준비시간은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입니다.
11시 정각이 되면 배식이 시작됩니다.
두 시간 사이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합니다.
그 시간 급식소는 전쟁터와 같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드디어 11시가 됐습니다.
이용자는 벌써 들어와 앉아있습니다.
이제 배식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안심했을 때 큰일이 터집니다.
오늘 국은 육개장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간을 봤습니다.
매웠습니다. 보통 매운 게 아니었습니다. 무진장 매웠습니다. 못 먹을 정도였습니다.
순간 사이렌이 울렸고 비상이 났습니다.
머릿속이 텅 비었습니다.
모든 봉사자가 일제히 얼음이 됐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납니다.
앉아있는 이용자들은 봉사자에게만 시선이 고정됐습니다.
너무나 창피했습니다.
난감했고 자포자기하고 싶었습니다.
재빨리 집으로 줄행랑 치고 싶었습니다.
아내가 빨리 마트로 달려가 콩나물을 사오라 했습니다.
물을 안치고 콩나물국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크리스토퍼 사장님들은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했습니다.
재치 있게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진땀 났던 하루였습니다.
가끔 이런 스팩타클한 일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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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종군(白衣從軍)이란 흰색 옷을 입고 전쟁터에 나가 싸운다는 뜻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인기가 급상승 하자 주위에 시기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이로 인해 모든 직책을 빼앗겼습니다.
그래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계급과 권한을 모두 내려놓고 가장 아래에서 전쟁을 치룬 것입니다.
조선이란 나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우리 모두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이라 부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를 너머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제독(提督, admiral or flag officer)이라 불리울만 합니다.
정치인이 많이 쓰는 말인데 과연 이럴까 의문이 듭니다.
백의종군의 본뜻은 내가 가진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처음으로 돌아가 “밑바닥부터” 다시 하겠다는 의미인데 말입니다.
진짜 처음으로 돌아갈 자신 있습니까? 정말 옛날로 돌아갈 자신 있습니까?
그러나 나는 다른 각도에서 뜻풀이를 해보고 싶습니다.
이순신의 뚝심, 결연한 의지를 보았습니다.
임금에게 아첨하는 자들에게 맞서 조금도 변함없이 걸어갔던 그,
한번이 아닌 두 번의 백의종군을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인생이 망하고 패배한 것 같은데 다시 일어섰던 그분의 정신.
무료급식을 미친듯이 하다보면 아무 이유없이 밸(창자)이 꼬이게 만드는 존재가 나타납니다.
살살 시비걸고, 괜히 미워하고, 관청에 민원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뚝심있게 치고 나가겠습니다.
중간중간 쓰러지고 망한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이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면 확신을 갖고 백의종군 하겠습니다.
나도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먼 훗날 어떻게 평가해줄지 모르지만 죽는 날까지 처음가졌던 마음 그대로 간직한 채 나아가겠습니다.

Posted by 만나무료급식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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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부터 무료급식을 시작해 12년이 됐습니다.
처음엔 볼품없었습니다. 규모도, 재정도 작고 미흡했습니다.
당연한 게, 더열린교회가 전부 부담하기엔 한계가 있었고, 삼삼오오 개인후원도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2016년 비영리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단체를 만들고 지금까지 8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셨고 여러 후원자가 도와줬습니다.
단체를 만들려면 "기본재산"이 있어야합니다.
기본재산이 없으면 통과시켜주지 않습니다.
기본재산은 임의로 쓸 수 없는 돈입니다.
단체가 존속하는 한 그대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급하다고 해서 유용할 수 있는 돈이 아닙니다.
우리 입장에선 목돈을 들어가는 것이고 굉장히 아까웠지만 모험을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비영리단체를 만들고 날개를 펼 수 있었습니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성장했습니다.
정부가 정한 기준에 부합한 단체가 되니 인식이 달라졌습니다.
국가가 공인하고, 사람들이 인정한 것입니다.
저절로 후원기업이 생겼습니다.
믿고 후원하는 개인과 단체가 생겼습니다.
정말 복 많이 받았습니다.
처음엔 기본재산이 아까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받은 셈입니다.  

현재 무료급식소가 이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임대료가 비싼 곳입니다.
그래도 결단해야 했습니다.
다시 한 번, 큰 모험을 걸기로 다짐했습니다.
배포가 그렇게 두둑하지 않지만 그래도 늘 함께하는 주님을 신뢰하며 가보겠습니다.

내 글은 "인간 김성민"입니다.
살아가면서 직접 경험한 것들입니다.
삶에서 체험했던 재료를 가지고 글쓰기를 합니다.
사골국물 처럼 푹 우려낸 것들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얄팍한 잔꾀로 위기를 모면할 수 없습니다.
거짓으로 지어낼 수 없는 글입니다.
만약 지어냈다면 언제 들켜도 들킬 것입니다.
무료급식을 시작하고 12년을,
또 공인된 단체를 만들고 8년을 지내왔습니다.
많은 후원자가 지켜보았고, 주무관청이 관리감독했습니다.
무료급식을 하면 할수록 "정직"이 제일 중요한 덕목이란 걸 깨닫습니다.

지난 3월 9일이 둘째 아이 생일이었습니다.
조촐하게 가족 외식을 갔습니다.
미취학아동은 5천원, 초등학생부터는 12,900원이었습니다.
첫째가 학교를 다닌 지 5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순간 엄마가 어떻게 된 건지 첫째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주야, 너 유치원 다닌다고 할래?”
“엄마 나 초등학교 1학년 1반 6번이야. 거짓말하면 안 돼.”
아이 말이 맞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정직을 가르쳐야 하고, 부모가 먼저 정직해야 합니다.
“내가 손해보는 순간이 와도 정직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망각하는 순간 무료급식소는 망한다.”란 일념으로 살아갑니다.
기본재산보다 더 많이 후원받는 이유,
우리를 믿고 흔쾌히 지갑을 여는 이유는 "정직"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이 안 가는 단체에 무슨 후원을 하겠습니까?
말에 앞뒤가 다른 사람에게 무슨 돈을 보내겠습니까?

전에 교회에서 사람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근데 자꾸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닙니까?
한 번, 두 번은 넘어갔지만 더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인연을 끊어버렸습니다.
이제는 그 사람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안 믿습니다.
절대 거짓말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칸트가 말했던 "선한거짓말"이라 할지라도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거짓말은 절대절대 안 됩니다."
기본재산을 뽕빨 뽑을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단체를 만들었고,
둘째, 삶 속에서 정직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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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자리

카테고리 없음 2024. 3. 25. 23:34

가끔 대형마트에서 물건을 구입합니다.
쇼핑을 마치면 주차한 곳까지 카트를 끌고 가 트렁크에 짐을 싣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빈 카트는 제자리에 놓고옵니다.
놓고 올 때도 과격하게 휙 처박지않고 카트보관소에 곱게 집어넣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교육하는 게 있습니다.
식당에 가서 밥 먹을 때 조용히 먹기.
서빙하는 어른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 내가 앉았던 의자를 직접 집어넣기.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께 배운 게 있습니다.
“사람은 앉았다 일어난 곳이 깨끗해야 한다. 뒤가 구려서는 안 된다. 끝맺음을 잘 하고, 명확히 해라”
수시로 뒤를 돌아보며 내가 머물렀던 곳을 살펴야 했습니다.
형편상 그렇지 못해도 마음 속 깊은 데는 “은혜갚음”에 대한 강박이 있어야 함을 익히 배웠습니다.

40년 전, 강원도 철원에서 살았습니다.
교회 장로님께 10만원을 빌렸습니다.
잃어버렸다가 갑자기 꿈에서 생각났습니다.
그 즉시 철원으로 달려가 갚고 온 사람이 우리 부모님입니다.

하던 사업이 망하면 살던 곳에서 야반도주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엔 더 뻔뻔하고 낯짝 두꺼운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동네를 떠도 내가 저지른 일은 깨끗이 처리한 다음 뜨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던 분이 우리 부모님입니다.
이것을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상관없습니다.
우리 가족끼리 나눈 대화는 사실이니까요.
“여보, 우리는 빚 다 갚은다음 이사갑시다. 여러 사람에게 축복받으며 떳떳하게 갑시다. 그때 비로써 아들이 있는 교회로 갑시다.”

지역에서 함께 사역하던 목사님이 있습니다.
사정상 교회를 이전해야 했습니다.
기존의 땅을 급히 처분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야 새로운 성전으로 이전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교회가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단 교회가 가장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단에게는 넘기지 않겠다.”
그때부터 주사랑교회 정명범 목사님을 달리봤습니다.

우리 교회도, 무료급식소도 이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11년 전 들어올 때, 먼저 있던 사장님께 시설비(권리금)를 주고 들어왔습니다.
현재까지 건물에 들어간 인테리어비도 상당합니다.
그러나 다 안 받으려 합니다.
괜히 받았다가 이상한 소문에 휩싸일까봐 그냥 깨끗하고 원만하게 처리하려는 마음입니다.
사업하는 것도 아닌데 교회에서 권리금이 웬말입니까?
좁은 지역에서 언제 나도 날 소문입니다.
소문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배운 대로 행동하려는 겁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습니다,
내가 앉았다 일어난 곳이 깨끗하길,
다음에 들어오는 사람이나 교회가 더 부흥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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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식

카테고리 없음 2024. 3. 22. 14:12

토요일 오전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끼는 시간입니다.
누구의 터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무료급식도, 육아도 없는 나만의 세상이 열립니다.
설교준비란 부담도 있지만 이 시간만큼은 나만을 위해 씁니다.
제일 자유하고 제일 편안합니다.

선거철입니다.
여,야 할 것없이 민생을 챙긴다고 소란입니다.
어제 대통령이 민생토론회를 열었습니다.
어르신을 위한 주거와 식사에 신경쓰겠다 했습니다.
정부가 주 5일 점심을 제공하겠다 약속했습니다.
야당은 한 발 더 나아가 주 7회 무료식사를 제공하겠다는 공약을 내놨습니다.
과도한 포퓰리즘 아니냐 말하고 싶지만 우리가 하는 일과 겹치는 부분이라 아무 말도 못하겠습니다.
단지 이럴 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위기의식을 갖게 됩니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우리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 같습니다.
관리감독을 받는 주무관청에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보조금을 삭감하려는 조짐이 보입니다.
사실 예전부터 이래왔습니다.
중앙정부 혹은 지방자치에서 직접 운영하는 게 아닌 사설로 운영하기에 가지치기가 쉬울 테죠.
그래서 항상 노심초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잘해왔습니다.
지시하는 대로 잘 따랐으며, 관공서와 좋은 유대감으로 소통하는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문제는 내 마음입니다.

네이버 블로그 방문객이 하루평균 2~30명 정도가 됩니다.
근데 어제는 갑자기 500명이 됐습니다.
무슨 일인가 궁금했습니다.
타고 온 검색어가 “손흥민, 무료급식” 이런 것이었습니다.
전에 손흥민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는데 이 글이 우연히 상단에 검색됐나 봅니다.
실상은 어떤 유튜버 때문에 이슈화가 된 건데,
손흥민이 영국에서 무료급식소를 열었다는 확인되지 않는 가짜뉴스를 만든 것입니다.
어쨌든 이럴 때마다 예민해집니다. 사회이슈에 신경이 곤두섭니다.
항상 마음이 불안합니다.
무료급식을 하면서 한번도 마음 편했던 적이 없습니다.
항상 조마조마 했습니다.
“당장 지원이 끊기면 어떡하지?
후원이 작게 들어오면 어떡하지?
과연 이번 달 월세와 전기세는 낼 수 있을까?”
하지만 주님이 준 평강으로 다시 새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무료급식만 하고 있지 않습니다.
위기가정을 위해서도, 노인일자리를 위해서도, 소외청소년과 결손아동을 위해서도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바자회도 열어서 사회를 위해 헌납합니다.
시선이 우리나라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계를 바라봅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위해서도 돕습니다.
여타의 NGO단체가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단체는 항상 앞을 내다보며 지금의 위기를 타파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무료급식을 책임질 테니 만나무료급식소는 손떼십시오.”라고 말해도
기필코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찾아오는 사람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할 수 없다면,
거동이 불편한 사람을 찾아가 식사를 전달하는 일로 전환하겠습니다.
새로운 일을 재빨리 발굴하겠습니다.
단체정관도 미리미리 바꾸겠습니다.
항상 앞날을 내다보겠습니다.
발빠르게 움직이겠습니다.
지역사회 너머 세계와 인류를 직시하겠습니다.
이래서 내 머리는 항상 복잡합니다.

Posted by 만나무료급식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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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이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교회와 무료급식을 시작한 지 11년이 됐습니다.
세월 참 빠릅니다.
여기 와서 복 많이 받았습니다.
전국에서 가장 핫한 곳,
인구유입이 활발한 곳,
평균연령이 낮은 곳,
현대기아차연구소가 있는 엘리트 지역,
외국인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사는 글로벌한 곳,
지금도 무섭게 변화하는 곳에서 즐겁게 사역했습니다.
좋은 건물주와 이웃을 만나 재밌고 신나게 사역했습니다.
원래 이곳은 대대로 교회자리였고, 눈물의 기도가 고스란히 녹아져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들어오기 전에도 두 개의 교회가 터를 잡았습니다.
나갈 때도 다 잘돼서 이전했습니다.
한 교회는 부흥해서 종교부지를 구입해서 나갔고,
또 다른 교회도 건축해서 나갔습니다.
건물주가 교회에만 세를 주길 원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나갈 때가 됐습니다.
교회 부지를 구입했고, 건축도 앞두고 있습니다.
무료급식소도 “타의(他意)에 의해” 이전해야 할 상황입니다.
일사천리로 동시에 움직여야 합니다.
특별히 무료급식은 우리 교회의 주 사역이기 때문에 심사숙고해서 옮겨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철저한 기준과 조건을 세웠습니다.
1. 기존의 이용자들이 변함없이 애용할 수 있는 곳,
2. 교통편이 좋은 곳(버스 정류장),
3.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을 비롯한 소외계층이 많이 사는 곳(LH아파트 부근),
4. 관공서의 기준에 부합하는 곳.
이 모든 기준에 합당한 곳을 찾아다녔고 결국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급식소도, 교회도 동시에 이전하게 됐습니다.
교회 공동회의를 마쳤고, 단체 이사들과도 합의를 봤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장소를 빼려고 합니다.

혹시 교회이전이나 개척을 알아보는 교역자나 신학생이 있으면 우리가 있던 곳을 추천합니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다 괜찮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5Km 떨어진 곳으로 떠납니다.
목회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겁니다.
동시에 현재 무료급식소 장소도 비워야 하고요.
입지가 좋아서 어떤 업종이 들어와도 좋을 것입니다.
특히 인력사무소가 들어오면 좋겠습니다.
주위에 홍보 부탁드립니다.
더 큰 미래를 향한 날개를 활짝 펴서 비상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그대로 앞으로 전진하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나아가겠습니다.
010-4258-6689 김성민 목사

Posted by 만나무료급식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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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 곡해

카테고리 없음 2024. 3. 20. 15:32

아주 가끔씩 매스컴 출연 제안을 받습니다.
특히 사회가 어려울 때, 경제가 힘들 때, 겨울철이 다가올 때 제안 횟수가 많아집니다.
예전엔 TV에 나오는 걸 꺼렸습니다.
담당 작가가 전화하면 일부러 피했고 거절했습니다.
언젠가부터 마음을 바꿨습니다. 이랬더니 그때부터 제안이 들어오지 않더군요.
한 달 전에도 TV조선에서 취재오기로 했는데 내부사정으로 취소됐습니다.
JTBC에서 무료급식소를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무 순진했고 착각했던 게 있습니다.
약속 당일 카메라와 마이크만 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리포터의 위치와 구조, 심지어 대본까지 완벽하게 숙지한 다음 내방했습니다.
질문까지 달달 외우고 왔습니다.
기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굉장히 똑똑해야 할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메인뉴스 2~3분을 채우기 위해 많은 사람의 수고와 땀이 들어갔음을 깨달았습니다.
취재 중 이용자에게 질문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밖에서 줄 서 있는 이용자 중 한 사람을 지목했습니다.
“선생님, 여기 자주 이용하세요?”
“네, 매일 합니다.”
“무료급식소 밥 맛있나요?”
“그럼요. 맛있습니다. 집밥처럼 맛있게 잘 나와요.”
“만약 여기가 문을 닫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굶어야죠. 굶을 수밖에 없어요.”
모든 인터뷰가 끝났습니다.
실제로 이대로 방송이 송출됐습니다.
그날 저녁 이 뉴스에 댓글이 달렸습니다.
긍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힘내세요. 응원합니다. 무료급식소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댓글도 있었습니다.
“무료급식소가 문닫으면 ‘굶어야죠’라고 대답하는 게 맞나? 어떻게 그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나? 정신상태가 안됐다. 분명 노력도 안 하는 사람일 것이다.”
정말이지 “세상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구나” 또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인터뷰에 응했던 사람은 갑자기 뇌출혈이 와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손도 말려있고, 걷는 것도 한쪽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닐 수밖에 없는 사람,
조금만 추워도 혈액순환이 안돼 마비된 손을 주물러줘야 하는 사람,
가난하고 외롭게 사는 사람임을 내가 증명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단지 말하는데 크게 지장이 없기에 인터뷰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묻는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했을 겁니다. 결코 생각없이 답한 게 아닙니다.
NG도 났고 연습도 했습니다.
과연 이 모든 내막을 알았어도 그렇게 댓글을 달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듭니다.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며 호의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정적이고 회의적이며 비관적인 사람도 존재합니다.
아무리 선행을 해도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오해하고 왜곡하고 곡해하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그런 시선으로 봅니다.

Posted by 만나무료급식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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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 아내가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며 저녁을 준비합니다.
파 송송 계란 탁,
식사 준비가 끝나고 아이들을 부릅니다.
“얘들아 밥 먹어라”
그런데 군것질을 많이 했는지 쭈뼛쭈뼛 오더니 인상을 찌푸린 채 말합니다.
“밥 안 먹을래요.”
말이 끝나자마자 한순간 정적이 흐릅니다.
일제히 공포가 감도는 초긴장의 상태가 찾아옵니다.
그 누구도 엄마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합니다.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난 것입니다.
아내가 저음으로 말합니다.
“먹어”
그제야 세 남자는 군말 없이 식탁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먹기 시작합니다.
아내의 짧고 굵은 목소리는 흔치 않습니다.
이 사실을 알기에 세 남자들은 쥐 죽은 듯 가만히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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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무료급식소를 찾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날씨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봄이 오니 외출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것도 아닌 게 날씨와 상관없이 인원이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아침일찍 출근해 식사를 준비합니다.
내 가족이 먹는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쏟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식사를 준비했어도 먹으러오지 않으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아무리 잘 꾸며놓은 무료급식소라도 이용자가 없으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
우리가 보람을 느끼는 이유는 다 이용자 때문입니다.
이용자가 찾아와 맛있게 먹어주면 굉장히 기쁩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이용자들에게 틱틱거리며 퉁명스럽게 대하지 않으려 합니다.
겸손하고 따뜻하게 대하려 노력합니다.
우리의 고객이기 때문입니다.
군것질했다고, 아니면 반찬이 맛이 없다고 밥투정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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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해주신 덕분에 좋은 장소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현재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빈 상가가 있습니다.
월세가 만만치 않지만 맘에 쏙 듭니다.
다른 곳도 찾아봤는데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더 기도해보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겠습니다.

Posted by 만나무료급식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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