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

카테고리 없음 2023. 8. 28. 15:45

우리 무료급식소는 여러 후원자가 함께하는 곳입니다.
오늘도 무료급식을 잘 마쳤습니다.
무사히 끝냈습니다.
내가 끝낸 것 같지만 사실은 여러 후원자 덕분에 끝낼 수 있었습니다.
후원자가 없었다면 시작도 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원자가 귀합니다.
그 고마움을 깨달아 후원자 마음에 작은 상처라도 입히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합니다.
옛말에 “누울 자릴 봐가며 발 뻗어라”했습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까지 신경 씁니다.
“그렇게 살면 고달프지 않니?” 묻는 사람도 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편합니다.
그냥 내 인생 그대로를 보여드립니다. 그래서 고달프지 않습니다.
우리의 진심을 여과없이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또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한번 맺은 인연을 귀하게 여깁니다. 끝까지 가려합니다.
시골에 가면 집집마다 마당 한가운데 모닥불 피는 아궁이가 있습니다.
그곳에 갓 잡은 한우 우족을 넣고 12시간 푹 우려낸 진한 사골국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질리지 않는 사람, 변덕부리지 않는 사람이 좋습니다.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변덕부리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씁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씁니다.

1988년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 왔습니다.
작은 용달을 빌려 이삿짐을 쌓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요?
때마침 비가 쏟아졌습니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엄청 퍼부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새 집주인과 계약문제가 생겼습니다.
용달 기사는 길 한복판에 짐을 내려놓고 가버렸고
우리식구는 얼른 대형비닐을 빌려와 가구를 덮었습니다.
비를 홀랑 맞았습니다.
온 식구가 슬프고 서러워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빗물과 눈물이 섞여 더 슬펐습니다.
이때가 국민학교 3학년 때입니다.
내 집, 내 땅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곳에 정착할 수도 없었습니다.
인생 참 비참했습니다.
이런 세월을 겪고 지금의 자리에 있습니다.
지난 과거를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견뎠고 이겨냈으며 다 극복했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지금을 더 열심히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2023년 현재도 내 과거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지 살피며
그들에게 힘이 돼주려 내 남은 인생을 바치기로 결정했습니다.

옛날엔 “성미”가 있었습니다.
삼시세끼 밥을 짓기 위해 쌀통에서 쌀을 풉니다.
식구 수대로 푼 다음 다시 숟가락으로 그 쌀을 덜어냅니다.
4식구면 네 번을 숟가락으로 떠서 성미주머니에 담습니다.
담을 때도 두 손 모아 정성껏 담습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담습니다.
그것을 금요일 저녁에 있는 속회에 가져가서 교회에 바칩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것을 보고 자랐습니다.
“우리도 어렵지만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 어려운 목회자들, 어려운 선교사들에게 무조건 무조건 잘 해야 한다.”며 몸소 배우며 자랐습니다.

어렸을 땐 돈이 없어 간식을 못 사먹었습니다.
어머니는 교회 성가대를 섰습니다.
주일 저녁예배가 끝나면 성가대원은 남아서 그 다음 주에 부를 곡을 연습했습니다.
그러면 대원들에게 제과점 팥빵을 하나씩 나눠줍니다.
우리 엄마는 집에 있을 아들 주려는 마음에
먹고 싶어도 꾹 참고 슬며시 가방에 넣습니다.
나는 엄마가 올 때를 목 빠지게 기다립니다. 사실은 팥빵 때문입니다.
그 맛을 잊지 못해 성인이 된 지금도 팥빵을 가장 좋아합니다.

지금은 그때같지 않습니다.
맛있는 것도 맘껏 먹을 수 있고, 좋은 곳도 맘껏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엔 무언가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 밀려옵니다.
누구한테란 대상도 없이 그냥 미안합니다.
아마 계속 없이 살다보니 그것이 몸에 젖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를 믿어주는 후원자들에게 내가 걸어온 인생을 공개하고 싶었습니다.
더 돈독한 관계가 되고 싶었고, 나를 믿어주는 당신에게 실망시키기 싫어서였습니다.
한번에 확 뜨고, 한번에 확 사라지는 스타가 되기 싫습니다.
언제나 묵묵히 여기서 무료급식과 목회를 하고 있겠습니다.
우리를 믿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후원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Posted by 만나무료급식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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