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사강감리교회를 출석했습니다. 모(母)교회입니다.
교회 안에서 놀고 먹고 잤습니다.
교회가 놀이터였고 친구였으며 보금자리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감리교신학교 목회학 석사과정(M.Div.)을 입학했습니다.
평소 꿈꿔왔던 곳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축하해줬습니다.
감리교 안에서 자라왔고, 배웠기 때문에 목회도 감리교회에서 할 거라 믿었습니다.
감리교 목사 뿐이 몰랐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달려갔습니다.
신학교에서 코피 터져가며 공부했습니다. 피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명문대 나온 동기들 틈바구니에서 죽어라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안 하면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서울대 및 뉴욕대 출신 현직 교수들, 인천공항 관제사 등 엄청난 경력의 소유자들이 포진했습니다. 날고 긴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밤새워 공부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도 졸업할 때까지 평균 3.51/4.0 학점밖에 맞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고,
당연히 감리교단으로 개척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감리교를 뛰쳐나와 내 멋대로 개척을 해버렸습니다.
나 하나 때문에 지역의 감리교회들이 반목과 분열이 생겼습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 당시 너무 어렸습니다. 혈기왕성했고 인내를 몰랐습니다.
1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했던 것을 사죄드립니다.
이 때문에 상처를 입은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 죄송하다는 말씀 전합니다.
특히 경기연회 남양지방의 모든 감리교회 목사님과 성도님들께 사죄합니다.
진작부터 마음먹었던 것인데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글로 대신하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 분, 한 분 찾아가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감리교 밖에 있지만 언제나 웨슬리안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위해 하루하루 전진해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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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료급식과 목회를 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본업입니다.
사역 이야기를 글로 담습니다.
무료급식과 목회와 글쓰기를 할 때마다 객관적으로 행동하려 애씁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습니다.
내 가족이라 해서 간식을 더 챙기지 않습니다.
내 자녀라 해서 다른 사람 있는 데서 오냐오냐 하지 않습니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비굴한 모습도, 지나친 교만도 아닌 중도(中道)의 외줄타기를 탑니다.
개인적으로 대화할 땐, 나를 가리켜 “저”를 쓰지만,
글쓰기 할 땐 “저” 대신 “나”를 씁니다.
가독성(可讀性) 혹은 글의 문맥상 이게 더 낫기 때문입니다.
어린 친구들이 내 글을 읽습니다.
사실 부모님들이 반강제로 읽게 만듭니다.
배려와 희생정신, 삶의 의지를 배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저절로 나오는 행동이 1만원의 정기후원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친구가 10명은 족히 넘습니다.
때론 어린 사람에게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20세 탁구선수 신유빈이 인터뷰를 했습니다.
“정신력부터가 흐트려지면 경기에서 지고맙니다. 그래서 언제나 파이팅하며 싱글벙글 웃는 겁니다.”
이 인터뷰를 접하고 나도 배웠습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기로요. 강한 정신력을 소유하기로요. 신유빈 때문에 인생을 배웠습니다.
어른에게도, 어린 친구에게도 배우는 자세를 가지겠습니다.
최대한 수용성을 끌어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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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교회 개척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때 모인 헌금으로 교회 승합차를 구입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첫 기름을 넣어주셨습니다.
“전도사님, 새 차인데 첫 기름은 우리 부부가 넣어드릴게요.”
15년이 지났는데도 이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말씀했던 억양, 톤, 표정, 분위기까지 머릿속에 그대로 있습니다. 아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아마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잊지 못할 겁니다.
우리 부모님은 아들 목사를 굉장히 챙깁니다.
아들 사역이라면 버선발로 나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줄 분들입니다.
특히 무료급식 할 때, 물심양면으로 돕고, 음지에서 돕고, 온갖 궂은일을 도맡는 분들이죠.
이만큼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부모님의 은덕 때문입니다.
근데 아버지가 갑자기 편찮습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사다리에 올라가고, 집수리도 하고, 급식소 햇빛가리개도 달고 했는데 지금은 안 좋습니다.
다행히 수술하고 회복중인데, 구부정한 뒷모습을 볼 때마다 괜히 눈물이 납니다.
정기봉사자 절반이 여름휴가를 떠났습니다.
일주일간 제한된 봉사자와 함께 무료급식을 진행했습니다.
긴장도 됐고, 힘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보람도 있었죠.
그동안 설거지하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걸 알고 크리스토퍼 사장님들이 도와줬습니다.
사업을 접고 자발적으로 온 것입니다.
눈물이 나더군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데 이런 사랑을 받으니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대부분 남자 봉사자들이었습니다.
무료급식을 하면서 오늘같이 진기한 풍경은 또 처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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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컴퓨터 수리점을 운영했습니다.
컴퓨터가 고장나면 “경기PC종합병원 김성민원장”을 찾았습니다.
증상도 척척, 수리도 척척, AS보증도 척척 잘했습니다.
부품가격도 합리적으로 제공했습니다. 많이 안 떼먹었거든요.
사람들은 나를 “컴퓨터 박사”라 불렀습니다. 혹은 “AS기사”라 불렀죠.
나름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사무실 한 구석에 고장 난 컴퓨터가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과거에 쌩쌩 돌아갔던 컴퓨터들이 이제는 퇴물이 돼 구석에 쳐박혀있습니다.
그것을 꺼내 어찌어찌해서 고쳐놓습니다.
미다스(Midas)의 손처럼 고물 컴퓨터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무료급식소를 운영합니다.
과거에 잘 나갔던 사람들이 나이들어 급식소를 찾습니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정말 대단했던 사람들입니다.
중동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산업역군이었던 사람,
김영삼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 직원이었던 사람,
청계천에서 잘나갔던 공구상 사장이었던 사람,
크게 목회했던 목사님까지 정말 다양합니다.
이런 사람을 볼 때, 구석에 있던 고장 난 컴퓨터가 생각났습니다.
그도 한땐 최신형으로 잘 나갔을 텐데 말이죠.
이제는 나이 들었다고, 돈이 없다며 괄시와 천대를 받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급식소가 그들에게 새 희망을 심어주려고 합니다.
삶의 의미와 의지를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회에 꼭 있어야 할 AS기사입니다.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여주는 김성민은 애프터서비스 맨입니다.
얼마 전, 휴대폰이 고장 나 고객센터를 찾았습니다.
내부가 굉장히 깔끔했고 친절했습니다.
유니폼을 입은 기사들이 프로페셔널 했습니다. 전문가다웠습니다.
우리 급식소도 삼성AS센터처럼 품격 있는 곳으로 만들어가겠습니다.
이 사회를 책임지는 애프터서비스센터는 만나무료급식소입니다.
이전공사를 시작하기 전, 고민이 있었습니다.
“주방과 홀의 구조를 어떻게 배치할까?”
오랜 시간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내린 결론이 “반반씩 나누자”였습니다.
절반은 주방, 절반은 홀로 짰습니다.
우리에겐 이용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봉사자도 중요하죠.
정기봉사자들의 동선이 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홀이 좁더라도 주방을 넓게 한 것입니다.
내 마음속엔 이용자도, 봉사자도, 후원자도 다 중요합니다.
특정부분에 비중이 치우치지 않도록 신경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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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야구장이 많죠.
그 중 천장이 막혀있는 돔구장은 하나 뿐입니다.
그러나 미국에는 여러 개의 돔구장이 있습니다.
이상한 건, 천정을 완전히 막아놓지 않고 작은 구멍을 뚫어놨습니다.
설계자에게 물어보니 “재밌는 야구경기를 우리만 볼 수 있나요? 하나님도 구경하셔야죠. 그래서 천장을 뚫은 것입니다.”
미국인들 무의식 속에는 코람데오의 하나님이 내재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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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와 과일을 좋아합니다. 당연히 수박도 좋아하죠.
수박을 먹으면 빨간 부분이 없이 완전히 먹습니다. 이게 버릇입니다.
알뜰하게 먹는다는 얘길 듣습니다.
주위사람들이 놀랍니다.
칭찬받으려 한 행동이 아닌데 어쨌든 기분이 좋습니다.
이제는 사람들 눈을 의식해 더 그렇게 먹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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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안 새게 행동합니다.
누가 지켜보는 것 처럼 살아갑니다.
야구장 천장에서 구경하는 하나님 처럼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하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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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내는 남자성격을 지녔습니다.
머리스타일도 숏컷만 유지합니다.
20세 때부터 사회생활을 했기 때문에 대인관계도 원만합니다.
누구에게나 말을 잘 걸고,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털털하고 순발력이 빠르며, 맺고 끊는 게 분명합니다.
피 한방울 안 날 것 같은 냉철함이 있습니다.
계산도 빠릅니다. 돈계산 할 땐, 몇 수 앞을 내다봅니다. 나는 절대 못 따라갑니다.
나에게 없는 성격이 그녀에게 있습니다.
봉사단체 사장님들이 오면 아내와 티키타카 말을 주고받습니다.
물 흘러가듯 이어갑니다. 농담과 진담을 번갈아 하며 재밌는 분위기를 만듭니다.
나는 이걸 못합니다. 말이 딱딱 끊깁니다.
큰일입니다. 말을 많이 해야하는 목사가 말을 제대로 못하니 큰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성도와 신앙상담할 때 아내는 옆에서 함구합니다.
입을 다물고 있다가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렇다 저렇다” 조언해줍니다.
남편이 말하고 있을 때 톡톡 끼어들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아내입니다.
서로 보안해가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결혼시켜 주셨습니다.
모든 일을 기쁘고 즐겁게 해치웁니다.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하고싶은 일을 하고싶어서 하는 스타일입니다.
매사에 낙관론자 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일처리를 합니다.
교육전도사 때나 방송실장 때도
맡은 일이 주어졌을 때, 주어진 일 외에 포트폴리오 두 세 개를 더 만들어 갑니다. 그러면 담임목사님이 좋아했습니다.
끊임없이 일거리를 만듭니다.
능동적으로 하기 때문에 지루하지도 않습니다.
재미로 하고, 신명나서 합니다. 웃으며 하고 자발적으로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삼시세끼 무료급식을 누가 시켜서 할 수 있을까요?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무료급식은 내 적성에 딱 맞는 사역 같습니다. 진짜로요.
소외청소년을 위한 생필품 전달사업 사랑의상자배달을 할 때마다 목돈이 나갑니다.
재정에 적잖은 타격을 입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을 끌고 왔습니다.
한번도 끊긴 적이 없습니다.
중간중간 돈이 없을 때가 있었습니다.
신기한 건, 그럴 때마다 도와주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쌀, 과일, 간식, 참치, 김, 두부, 생리대 등 개인후원자가 있었고,
또는 기업에서 한 달치 물품을 사줄 때도 있었습니다.
짜릿한 기적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죠.
이렇듯 좋아서 하니 자꾸 신나는 일들이 생기더군요.
정기봉사자의 절반은 이미 휴가를 다녀왔고, 나머지 절반은 이번 주에 간 상태입니다.
나는 지난 주에 다녀왔기 때문에 이번 주 내내 일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 몫까지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안내와 서빙, 설거지와 뒷정리 그리고 차량운행까지 아주 바쁩니다.
급식소가 번화가로 이전하고 애로사항이 생겼는데 주차문제입니다.
주차공간이 협소합니다.
봉사자들이 타고 온 차가 많습니다.
다행히 20년 전, 대한민국 운전면허는 다 따 놨습니다.
1종대형, 1종보통, 2종소형, 원동기, 레커, 트레일러, 지게차, 굴삭기 다 소지했습니다.
주차에 어려움을 겪는 여성 봉사자들이 오면 재빨리 나가 발렛파킹을 해주고 옵니다.
그래서 요즘 나온 차종은 거의 운전해봤습니다.
설거지를 하다말고 발렛요원까지 전천후 만능이 돼야 급식소를 운영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기쁩니다. 아주 신나요.
우리 아내에게 말합니다.
“당신, 내가 죽으면 다른 직장 갖지 말고 급식소 운영 계속 하세요.”
“당신이 죽긴 왜 죽습니까? 그리고 난 못합니다. 당신처럼 글쓰면 얼굴이 화끈거려서 못해요. 당신한테 딱 맞는 사역인걸요.”
글을 올리면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고, 안 가져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나는 얼굴이 두껍습니다.
“좋아요”가 하나도 없어도 괜찮고, 많아도 설레지 않습니다.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것뿐입니다.
급식소에서 일하는 게 너무너무 재밌고 신나고 스릴 넘치는 걸 어떡합니까?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날마다 그 꿈을 향해 전진합니다.
그것만 보고 전력질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아깝고요.
삼천포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꿉니다.
항상 내 처세에 대해 갱신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합니다.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 우리교회 성도, 봉사자와 이용자까지 모두 이렇게 되길 소망합니다.
나를 중심으로 딸릴 식구가 많습니다. 나만 바라봅니다. 내가 잘못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늘 조심스럽습니다.
자연히 리더 기질을 가지게 됐습니다.
때론 지금 이대로 안착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뿐인 인생을 관성(Inertia)과 습관에 취해 안주하고 싶지만은 않습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하나님이 주신 꿈을 펼쳐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결승점에 도달하겠습니다.
정정당당하게, 정직하고 투명하게 가겠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선한 능력을 힘입어 힘차게 도전하겠습니다.
강박증, 편협심, 피해망상, 경직된 사고, 우울증에 빠져있지 않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쓰라며 돈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단 호주머니에 들어오면 재정프로그램에 입력합니다.
그런 다음 목록에 맞게 지출하죠.
때때로 연말정산 때, “내가 후원한 것보다 많이 기부금영수증이 발급됐어요.”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래서 그렇습니다.
지금보다 커져도 이 습관을 꼭 지킬 겁니다.
이게 내가 가졌던 처음 마음가짐이었기 때문입니다.
난 돈에 대해 자유롭습니다.
숨겨둔 돈, 꼼쳐둔 돈이 없습니다.
우리단체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건전한 단체가 맞습니다.
우리의 꿈과 함께해주십시오.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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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를 출석하는 5학년짜리 여자아이가 무료급식 봉사를 했습니다.
너무나 예쁜 하나님의 보석이자 보배입니다.
결손아동을 위한 생필품전달사업 사랑의상자배달을 진행했습니다.
함께해준 모든 봉사자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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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삽니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여기서 35년째 살고 있습니다.
동네마다 집성촌이 있습니다.
같은 성끼리 촌락을 이루며 삽니다.
남양홍씨, 남양방씨, 배씨와 기씨 성을 가진 마을도 있습니다.
시골사람들은 유난히 토박이를 따집니다.
다른 곳에서 이사온 외지사람을 끼어주지 않는 성향이 다분합니다.
언젠간 떠날 사람이라며 뜨내기 취급하기 일쑤죠.
40-50년,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외지사람일 뿐입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 때부터 살지 않는 한 토박이는 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나는 외면받는 게 당연합니다.
사람취급 받지 않는 게 자연스런 현상일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대접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목회를 하고, 무료급식을 운영하면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지역에서 명망있고 영향력있는 유지들이 급식소를 찾습니다.
마을 원주민들, 지역소속 단체들이 자꾸 우리를 도와줍니다.
지역의 사회복지협의체, 로타리클럽, 라이온스클럽, 크리스토퍼, 의용소방대, 카네기, 복지관, 읍사무소 등 여러 단체가 우리와 협업하고 있습니다.
모두 지역에서 한 영향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쉬울 게 없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우리와 함께하자" 말합니다. "손잡자" 합니다.
분명 김성민 개인의 힘이 아닙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둘째는 봉사자, 그들의 인성 때문입니다.
겸손과 사랑의 인품이 철철 넘칩니다.
이런 단체들에게 고맙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그들 때문에 우리 급식소의 위상이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5년 넘게 아침 무료급식을 담당하는 우리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게 있습니다.
"난 늙어서 복받았어. 늙어서 추해진 게 아니라, 죽는 날까지 봉사할 수 있고, 베풀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시골 사람들이 나를 부를 때 얕잡으며 '어이~ 김씨, 김씨' 이렇게 안 불러. '김장로님, 김사장님, 김기호씨, 성민아빠'라 불러줘."
원주민이 이주민에게 이렇게 부른다는 게 기적입니다.
우리 가족을 인정해주고 사랑해주고 축복해줘서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라에 눈 먼 돈이 많아. 그거 다 빼먹어야 돼. 안 그러면 너만 바보야"
이런 말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빼먹는다"는 말부터가 억양이 안 좋습니다.
비열하고 사기꾼 같습니다.
곰처럼 미련하지 말고, 여우처럼 얄팍하게 움직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순수함이나 정직함이 없습니다.
근데 이렇게 살기 싫습니다. 정도(正道)를 걷고 싶습니다. 늦게 도착한다해도 지름길을 택하지 않겠습니다. 대로(大路)를 걷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람의 마음은 변한다" 말하지만 늘 깨어있고 갱신하며 살겠습니다.
언제나 배려와 존중과 두려움으로 살겠습니다.
휴가기간입니다.
가족과 함께 여행을 왔습니다.
매년 휴가비를 주는 고마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 넉넉합니다.
그런데 그래도 못사먹겠습니다.
김밥천국에서 멸치국수, 치킨,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웁니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 왔는데도 꼭 누가 지켜보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삽니다.
나를 포함한 우리 아내와 8세, 6세 아들까지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미래에 부자가 된다해도 이런 생활은 계속 유지할 것입니다.
이런 마음 변하면 망할 것 같고, 죽을 것 같은 일념으로 살겠습니다.
자연스레 몸에 익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겠습니다.
날 보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 사람은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 사기치지 않겠지"
장애와 사기가 무슨관계인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에게 신뢰를 심어줄 수 있어서 내 장애가 오히려 축복입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사기치지 않겠습니다.
보다 겸손하고 정직하게 무료급식소를 이끌어가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당부합니다.
"얘들아, 아빠는 장애인이잖아. 아빠를 생각해서 힘들고 약한 친구 있으면 너희가 적극 도와줄 수 있겠니?"
알았다고 대답합니다.
배려심 많고 정직한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뒤돌아보니 무료급식소 이전은 원래부터가 불가능했습니다.
큰 교회야 인력과 자금력과 행정력이 뒷받침 돼 일사천리로 할 수 있으나 우리한테는 만리장성보다도 더 큰 장벽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뒤엔 고마운 후원자가 존재했습니다.
인생의 고비고비 때마다 우리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무엇으로 감사를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급식소 장소이전에 대한 정관변경이 마무리 돼가고 있습니다. 믿고 인감증명서를 건네준 회원들 덕분입니다.
나 혼자였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외지사람, 뜨내기, 이주민에게 뭘 믿고 신용을 빌려줍니까?
그저 가슴으로 품고 아껴주는 당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단법인 단체를 만들었고, 공익단체와 집단급식소까지 통과됐습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힘들고 버거운 과정을 이겨낸 것입니다.
지금은 더 큰 곳을 향해 새로운 도전을 하고자 합니다.
이번 정관변경이 완전히 끝나야, 전기세와 수도세 변경을 포함한 모든 일이 순차적으로 해결됩니다.
관공서마다 고유번호증을 요구하기 때문이죠.
어쨌든 사실상 거의 통과 된 상태입니다.
또 이 과정을 통해 우리 단체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는데요.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에서 말하겠습니다.
무료급식이 끝나갈 때 쯤,
읍사무소 복지팀 주무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노숙자가 있는데 지금 데려가도 식사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모시고 오세요.”
고장 난 차에서 노숙하던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며칠을 쫄쫄 굶었다 했습니다.
갑자기 만나무료급식소가 생각나 데려온 것입니다.
“주무관님, 급식소가 이전했는데 어떻게 금방 찾을 수 있었어요?”
“그냥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같은 지역에 대형교회를 담임하는 분이 있습니다.
모범적으로 목회하고 있으며, 모든 이로부터 존경받는 목사님입니다.
전국을 다니며 개척에 대한 특강을 많이 하는데, 꼭 우리교회와 만나무료급식소 이야기를 합니다.
지역과 더불어 틈새목회를 잘하고 있고, 개척해서 성공적으로 안착한 교회라 설명합니다.
들을 때마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전하고 한동안 이용자가 줄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점점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이전하기 전과 엇비슷해졌습니다.
점점 소문이 나기 시작합니다.
급식소 간판을 보고 차를 세운 다음 구경하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궁금한 걸 물어보고, 후원도 하고 갑니다.
전화문의가 급증했습니다.
화성시 송산면에서 살았습니다.
송산국민학교, 송산중학교, 송산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전국에서 배구를 잘하는 학교로 송산초와 송산중을 꼽습니다.
전국청소년배구대회에서 우승도 많이 했습니다.
우승하는 날이면 온 동네가 시끄러워집니다.
현대 포니2 픽업트럭 뒤에 우승한 아이들을 태웁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꽃목걸이를 하나씩 겁니다.
양 길가에는 사람들이 나와 색종이와 꽃가루를 뿌려대며 열렬한 박수를 보냈습니다.
우승 카퍼레이드가 대단했습니다.
1990년대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현재 무료급식소가 잘나가고 있습니다.
전국대회에서 우승한 느낌입니다.
지금 내 마음에선 신이 났습니다. 속에서 댄스를 춥니다.
그러나 달갑지만은 않습니다.
잘나갈 때 조심해야 함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팍 뜨는 걸 경계합니다.
천천히 뜨고 싶습니다.
더욱 내실을 다지고 싶습니다.
겸손과 감사를 마음속에 꽉꽉 채운 뒤 하늘 높이 날아가고 싶습니다.
우리도 포니2 픽업트럭을 타고 성대한 카퍼레이드를 하고 싶지만,
또 한편에 드는 생각이 “그냥 조용히 살자”라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자연히 알려지고, 천천히 알려지고, 순리대로 알려지고, 하나님의 때에 알려지길 소망합니다.
미국을 한자로 표현하면, 아름다울 미(美), 나라 국(國)을 씁니다.
얼마나 예쁘면 “아름다운 나라”일까? 매일 상상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미국을 동경했습니다.
조금씩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내 나이 26세 때입니다.
미 서부지역을 혼자 정처 없이 다녔습니다.
현지 관광업체를 찾아가 패키지여행도 병행했습니다.
그랜드캐니언, 라스베이거스, LA할리우드사인,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씨월드 샌디에이고까지 가는 곳마다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왜 아름다운 나라인지 그때 깨달았습니다.
요세비티 국립공원도 갔습니다.
제주도 면적의 1.7배가 넘는 울창한 산림지대,
수천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져 있는 곳,
최소 몇 백 년 된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대자연의 경관에 압도 당했습니다.
가이드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만약에 번개가 쳐서 대형산불로 번져도 소방차가 출동하지 않습니다. 인위적으로 화재진압을 하지 않고 그냥 자연히 꺼지도록 놔둡니다. 수천 년 동안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 보존하는 게 환경보호입니다. 자연의 방법대로, 자연이 진화 하도록 인간은 그냥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진짜로 곳곳에 화재의 흔적이 있었고, 금세 복구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연의 힘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그때그때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옮깁니다.
글 쓸 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도록 나만의 장소로 이동합니다.
골방에서 오늘 있었던 에피소드를 풀어냅니다. 집중모드로 들어가죠.
가식이나 인위적으로 쓰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도 아니고, 사람을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근데 내 글을 읽고 주위에서 말을 많이 합니다.
“이번 글 이상했어요.
요거, 저거, 적절한 단어가 아닌 듯 해요.
목사님이잖아요. 그러면 목사님들이 쓰는 은혜스런 단어가 있을 텐데 이게 뭡니까?
너무 가볍지 않고, 장난끼 섞이지 않게, 진중하게 좀 쓰세요.
다시 수정하세요.”
이럴 때마다 기가 팍 죽습니다. 그때부터 글쓰기가 싫어집니다. 재미없어집니다.
전체 글에 대한 나의 의도는 배제한 채, 단어 하나, 문장 하나 가지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 안 됩니다.
절대 창의적인 글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축돼서 점점 글이 이상해집니다.
우리에겐 후원자가 많습니다.
남자, 여자, 노인, 어린이, 대학생, 일반인, 주부, 회사원, 목회자, 성도, 사장님, 직원, 불신자, 불교신자, 카톨릭신자, 원불교신자, 전직 무당 등등 아주 많죠.
이들이 내 글에 호기심을 갖고, 때론 감동받으며, 후원까지 이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연스러움, Natural”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는, 내 모습 그대로의 글, 눈치보지 않는 글을 좋아해주기 때문입니다.
요세비티에서 화재가 나도 사람이 개입하지 않는 것처럼, 개입은 자연보존이나 글쓰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글쓰기도 사역(하나님의 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재능을 주셔서 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라 생각합니다.
단어 하나 때문에 시시콜콜 꼬투리 잡고, 훼방하고, 시비 걸면 성령의 방해자가 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할 때면 하나님이 직접 나서지 않을까요? 김성민을 치시든 몰아넣든 말입니다.
글쓰기를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내 글이 보기 싫으면 김성민을 차단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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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류를 마쳤습니다.
이제 내 손을 떠난 상태입니다.
지금까지 도와준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관변경이 완전히 통과될 때까지 기도해주십시오.
그동안 모든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120% 발휘했습니다.
다 끝나니 그동안 붙잡고있던 긴장이 한순간에 풀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몸살이 찾아왔습니다. 이번엔 심했습니다.
오한과 고열, 편도염, 기관지염, 두통까지 4일간 일어나지 못한 채 침대에서 꼼짝 못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해 달려갑니다. 너무 과한 게 문제죠. 완벽주의 성향이 다분합니다.
빈틈이나 실수가 없이 하려고 애씁니다.
그때마다 허약한 몸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지금도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억지로 사무실에 나와 밀린 일을 해치우고 있습니다.
다시 툴툴 털고 빨리 일어나겠습니다.
단체의 이사는 인감도장을 대표이사에게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정관변경이 끝날 때까지 내가 가지고 다닙니다.
도장을 수령하러 다녔습니다.
안산에서 간판가게를 운영중인 이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무료급식소를 이끌어갈 줄 몰랐습니다. 전혀 몰랐습니다. 3년쯤 하다가 때려칠 줄 알았습니다.”
이 말을 듣고 기분이 묘했습니다.
칭찬 같으면서, 욕 같은 게 참 이상했습니다.
첫 사역지 안산명성교회 때인 2010년부터 현재까지 15년을 쭉 지켜봐왔습니다.
교회 개척할 때도, 급식소 시작할 때도 모든 간판을 여기서 무료로 해줬습니다.
이런 사장님이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간판을 설치해주면서 속으로 생각했겠죠.
“이 목사님 조금 하다가 그만두겠지”
근데 이 분 말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김성민, 재 힘들면 때려칠거야.”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어,,, 어,,, 하네… 계속 하네. 뭐 자꾸 북적북적 움직이네,,, 성장하고, 발전하고, 크게 되잖아”
지금은 김성민을 달리 보고 있습니다.
인정하는 만큼 앞만보며 끝까지 달려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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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한 번, 휴가기간이 있습니다.
사업계획서에도 명시된 것입니다.
그래서 떳떳하게 갈 수 있습니다. 일주일간 무료급식소 문을 닫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용자들을 생각하니 문을 못 닫겠더군요.
그래서 모든 봉사자가 휴가를 재조정했습니다.
우리만 바라보는 이용자가 존재합니다.
독거노인, 홀아비 어르신들이 존재합니다.
이를 생각했을 때 차마 문을 닫을 수 없었습니다.
휴가기간이라도 문을 닫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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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무료급식소 대표님인가요?
후원을 하고 싶은데 물품으로 하는 게 좋을까요? 현금으로 하는 게 좋을까요?”
“아,,, 네,,, 그건 선생님 마음대로 선택해주면 됩니다. 상관없으세요.”
상추, 노각, 고구마줄기, 쌀, 생리대 등을 후원하는 현물후원자,
금전으로 후원하는 정기후원자,
CMS자동이체 하는 CMS후원자,
결손아동이나 소외청소년에게 후원하고 싶어하는 지정후원자,
“특정 위기가정에 꼭 써주세요.”라고 말하는 특별후원자,
“무료급식소에 필요한 물품을 사세요.”라고 말하는 품목후원자와 일시후원자,
“목사님 가정에만 써주세요.”라는 개인후원자,
“교회에 헌금하는 겁니다.”라는 십일조, 감사헌금자,
정말 다양합니다.
이걸 내 임의로 해달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냥 후원자가 내키는 대로 하면 됩니다.
나는 짠돌이입니다. 굉장한 짠돌이 맞습니다.
돈이 너무 아깝습니다. 수도세, 전기세, 가스비, 월세, 다 아깝습니다.
이사 와서 첫 관리비 고지서가 나왔는데 65만원이 나왔습니다.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심장이 두근두근거렸고, 땅이 꺼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럴수록 1만원의 정기후원자가 귀합니다.
금전으로 정기후원 하는 사람들 때문에 연체없이 공과금을 지불할 수 있습니다.
무료급식 사역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소액의 정기후원자들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겐 현물후원자도, 특별후원자도, 정기후원자도, CMS후원자도 모두 다 필요합니다.
해충방지를 위해 세스코가 잘 관리해주고 있습니다.